본문 바로가기

낮, 법무법인 창천에서./판결로 바라본 그 때, 그 사건.

윤동주에게 내려진 판결문 전문 - 일본 교토 재판소


아래는 윤동주가 옥사에 이르기 직전 투옥의 근거가 된 판결문이다.

나는 아래 판결을 2008년, 대학에서의 강의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하고 간단한 웹 서핑을 통하여 판결문을 획득할 수 있었는데, 당시 필자가 느꼈던 감정은 황망하게도, 동양에서 최초로 근대화를 이룬 당시 일본 제국이 형식적으로라도 판결을 통한 법치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온 낯설음이었다. 

판결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윤동주는 도지샤 대학에 유학오기 전부터 조선독립의 의도가 있었고, 일본에서 실제 일정한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으며, 그 활동 내용은 주로 조선 민족 의식의 고양 및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 패전의 기원에 있었다. 그리고 이는 공범의 진술 및 피고인 윤동주의 법정 진술에 의하여 증거로 인정되었다.

이와 같은 판결문이 오늘도 존재하기 때문에, 윤동주의 투옥이 왜 이루어졌는 지를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느꼈던 낯설은 감정은 일본 식민주의 시대, 그것도 미국과의 전쟁 중인 시기에 이루어진 판결 치고는 상당히 관대한 판결로 느껴졌다는 데에서 온 것 같다.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 판결문의 인정사실이 사실이라고 전제한다면, 윤동주의 혐의는 오늘날로 치면 국가보안법 위반, 혹은 내란음모죄와 같은 중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징역 2년이라는 형의 선고를 하였는데, 이는 1940년대의 제국주의의 악령이 떠돌던 태평양전쟁 중 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일본에서의 법이 독립투사에 대한 탄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판결은 조선반도가 아닌 일본 본토에서 이루어진 판결인데, 과연 같은 사건이 조선법원의 관할에 있었다면 어떠한 내용의 판결이 선고되었을 지도 궁금할 뿐이다. 어쩌면 윤동주가 만주와 같이 전쟁 지역에서 위와 같은 혐의를 인정받았다면, 현장에서 바로 순국하는 등의 훨씬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점도 든다.

한편, 같은 내용의 혐의가 한국의 근대화 시기였던 지난 1~5공화국에서 법정에서 문제가 되었다면, 과연 징역 2년이라는 형으로 끝날 것인지 궁금하다. 또 하나의 사법살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라는 궁금함도 있고, 그만큼 지난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사법부의 역할이란 것이 그다지 중립적이지 못하였거나 공정하지 못하였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든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아래 판결에 비추어보아도 상당히 부끄러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판결은 판결일 뿐, 실제 윤동주가 아래와 같은 일을 하였는 지부터 그의 투옥 생활, 그리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상당 부분은 의문에 쌓여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의 경찰 및 검찰, 교정기관의 불법적인 혹은 비인간적인 행위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추정할 수 있다. 아래는 윤동주 판결의 전문이다.




 

판결

본적 : 조선 함경북도 청진 부포항정 76번지

(일제 강점기 때 조부 윤하현을 호주로 한, 윤동주 일가의 호적상의 본적은 청진시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증조부 때인 1886년에 함북 종성군에서 북간도로 이주하여 계속 살았으니 청진과는 사실상 연고가 없다.)


주소 : 교토시 사쿄구 다나카다카하라정 27번지 다케다 아파트 내


사립 도시샤 대학 문학부 선과

(일제 대 일본의 대학 학부에서는 당시의 고등학교나 대학 예과를 거치지 않은, 전문학교 출신자는 동등한 입시를 거쳐 같은 강의를 받아도 선과로 구별했었다. 그러나 행정상의 구별일 뿐 실질적인 차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윤동주는 문학부 영문학과 학생이었다.)


윤동주, 12월 30일생

(1918년 다이쇼 7년 일제 강점기 때 호적에 윤동주는 1918년(다이쇼 7년) 생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1917년생이다. 입적 신고가 늦었었다.)

위 사람에 대한 치안 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에지마 다카시 관여로 심리를 마치고 판결함이 아래와 같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미결 구류 일수 중 120일을 위 본 형에 산입한다.

 

이유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 있는 반도 출신 중농의 가정에 태어나 그곳의 중학교를 거쳐 경성 소재 사립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쇼와 17년) 3월 내지에 도래한 후 한 때 도쿄 릿쿄 대학 문학부 선과에 재학했으나 동년 10월 이후 교토 도시샤 대학 문학부 선과에 옮겨 현재에 이른 자로서, 어릴 때부터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 서적 등을 탐독함과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하여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성장하여 내선 간의 소위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이 원차의 마음을 품는 한편 아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 문화를 절멸하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 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선 민족의 현시의 실력 또는 과거의 독립 전쟁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대동아 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에 열세한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 기회를 타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망신하여 더욱더 그 결의를 굳히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도시샤 대학에 전교한 후, 이미 같은 의도를 품고 있던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학생 송몽규와 자주 회합하여 상호 독립의식의 앙양을 꾀한 외에 조선인 학생 마쓰바라 데루타다 (창씨명인 마쓰바라 데루타다의 본명은 알 길이 없다. 장성언은 윤동주의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 2년 선배로서, 교토에 옮긴 후 알게 된 사이로 짐작되며 퍽 가까이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미국에 거주한다.) 등에 대하여 그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해 왔는데 그중에서도,


첫째 송몽규(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고모의 아들)으로서 서로 동갑이며, 명동 소학교, 용정 은진중학교 하급반(송몽규의 출신 주학은 용정 대성중학교) , 연희전문 등에서 함께 공부했고, 교토 대학 사학과 재학 시절 윤동주와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2년 선고를 받고(공판일 1944년 4월 13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3월 10일 옥사했다. 그는 용정 은진중학 3학년 초(1935년) 에 남경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에 1년간 다녀와 그의 본적지인 웅기의 경찰서에 반년 가까이 구금된 일이 있다.)

 

(가) 1943년(쇼와 18년) 중순경 동인의 하숙처인 교토시 사쿄구 기타시라카와히가시히라이정 60번지 시미즈사카에 일택에서 회합하고 동경으로부터 조선, 만주 등의 조선 민족에 대한 선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한 뒤, 서로 이를 논란 공수함과 동시에 조선의 징병 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한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독립 실현을 위한 일대 위력을 더할 것이라고 논단하고,

 

(나) 동년 4월 하순경 교토 시외 야세 유원지에서 동인 및 같은 조선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릿쿄 대학 학생 백인준 (백인준은 윤동주의 연희전문 동급생이었으나 중도에 도쿄 릿쿄 대학으로 옮긴 것으로 전해지나 그 후의 일은 알 길이 없다. 위 여러 사람 중 이 사건으로 윤동주와 함께 구속 입건된 사람은 송몽규뿐이지만, 역시 모두 문초의 괴로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과 회합하고 서로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 제도를 비판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 제도의 실시에 의하여 새로 무기를 같고 군사 지식을 체득함에 이르러 장래 대동아 전쟁에 있어서 일본력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케 하도록 민족적 입장에서 그 제도를 구가하고, 혹은 조선 독립 후 통합 방식에 관하여 조선인은 당파심 및 시기심이 강하므로 독립의 날에는 군인 출신자의 강력한 독재제에 의하지 않으면 이의 통치는 곤란할 것이라고 논정한 끝에 독립 실현에 공헌하도록 각자 실력의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고,

 

(다) 동년 6월 하순경 피고인의 하숙처인 교토시 사쿄구 다나카 다카하라 정 27번지 다케다 아파트에서 동인과 찬드라 보즈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대두에 관하여 논의한 끝에, 조선은 일본에 정복되어 아직 일천하고 또한 일본은 세력 강대하기 때문에 현재 곧바로 동씨와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 지도자를 얻으려 해도 쉽게 이루 수 없는 상태나, 한편 민족의식은 오히려 왕성하므로 다른 날 일본의 전력 피폐하고 호기 도래의 날에는 동씨와 같은 위대한 인물의 출현도 필지하도록 각자 그 호기를 잡아 독립 달성을 위하여 궐기해야 한다는 뜻을 서로 격려하는 등, 상호 도립 의식의 격발에 힘쓰고,


둘째, 마스바라 데루타다에 대해서는,

(가) 동년 2월 초순경 다케다 아파트에서 조선 내 학교의 조선어 과목의 폐지됨을 논란하고 조선어의 연구를 권장한 뒤에,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비방하고 조선 문화의 유지, 조선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이 필수인 소이를 강조하고,

 

(나) 동년 10월 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조선의 교육 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포착하고 더욱이 내선 간에 선별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 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 독립이 급무하다는 뜻을 역설하고,

 

(다) 동년 5월 하순 같은 장소에서 대동아 전쟁에 관하여 도오 전쟁은 항상 조선 독립 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고찰함을 요하며, 이의 호기를 잃으면 가까운 장래의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조선 민족은 일본에 동화되고 말 것이므로 조선 민족인 자는 그 번영을 열망하기 위하여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전을 기해야 할 뜻의 자기의 견해를 누누이 피력하고,

 

(라) 동년 7월 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의 견지에 입각해야 한다는 뜻의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는 등 동인의 민족의식의 유발에 애쓰고,


셋째, 장성언에 대하여는,

(가) 1942년(쇼와 17년) 11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검거를 논란한 뒤, 문화의 멸망은 필경 민족의 궤멸이 틀림없는 소이임을 역설하고 예의 조선 문화의 앙양에 힘써야 할 뜻을 지시하고

 

(나) 동년 12월 초순경 교토 시 사쿄 구 긴카쿠지 부근 길가에서 개인주의 사상을 배격 지탄한 뒤, 조선 민족인 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이해를 떠나 민족 전체의 번영을 초래하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다) 1943년(쇼와 18년) 5월 초순경 앞에 서술한 다케다 아파트에서 조선의 고전 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한 뒤에, 문화적으로 침체하여 있는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조선 독립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소이를 역설하고,

 

(라) 동년 6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서 동인의 민족의식 강화에 자하기 위하여 자기가 소장한 <조선사 개설> 을 대여하고 조선사의 연구를 종용하는 등 동인의 민족의식의 앙양에 힘쓰고, 그로써 국체를 변혁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증거로 살피건대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에서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 법률에 비추어 보건대 피고인의 판시 소위는 치안 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므로 그 소정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고 형법 제21조에 의하여 미결 구류 일수 중 120일을 본 형에 산입한다.


이에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1944년(쇼와 19년) 3월 31일
교토 지방 재판소 제2 형사부
재판장 판사 이시이 히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