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재판관 권성의 반대의견
... 中略 ..
나. 앞에서 지적한 문제들이 내포하는 위헌적 요소들을 하나 하나 분석하여 논증하여 낼 필요도 없이 이 법률조항은, 국가권력에 대하여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할 것을 명(命)하고, 법(法)을 법(法)답게 만들 것을 명하는 헌법의 기본정신에 어긋나므로 위헌이라고 생각한다.
수표의 부도를 내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정말 열심히 그리고 정말 성실하게 기업을 경영하였으나 경제여건이 뜻밖으로 변화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부도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회사의 돈을 빼돌리고 고의로 부도를 내거나 상대를 속여 돈을 융통하고는 부도를 내버리는 불성실한 사람도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상징적으로 단순화하여 쉽게 말한다면, 선(善)한 사람을 선(善)하지 못한 사람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매도하는 것이, 바로 이 법률조항인데 이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는 처사가 아니다. 사람들은 부당한 처사를 당하였을 때 흔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라고 말한다.
성실한 기업가가 부도를 내고 구속될 때 그 내심에서 부르짖는 외침이 바로 이 말일 것이다.
나타난 사실의 이면과 경위를 살피지 아니한 채 사실의 외면만을 기준으로 하여 획일적으로 일을 처단하는 것은 국가의 입장으로서는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국가의 편의만을 생각하여 외면만을 보고 사람을 다루는 것은 문명한 사회의 법이라는 평가를 받기 어렵다.
드러난 외면의 같음(同)만 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이면의 다름(異)까지 살펴주는 섬세함이, 바꾸어 말하면 다른 것을 다르게 분별해내기 위하여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을 참아내는 인내심이 문명사회의 법이 갖추어야 할 기본요소라고 할 때 이 법률조항은 법이 법답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기본요소를 결하고 있다.
이것은 이 법 탄생 당시의 권력실태를 생각하여 보면 쉽게 이해되는 일이다.
국가권력에 대하여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할 것을 명하는 문명사회 헌법의 기본정신은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고 있는 우리 헌법 제10조에 잘 드러나 있고, 국가의 법이 법답게 만들어질 것을 요구하는 헌법정신은 적법절차를 규정한 우리 헌법 제12조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단 부도가 나기만 하면 옥석(玉石)을 구분(俱焚)함으로써, 성실하지만 그러나 불운한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않는 이 법률조항은 헌법 제10조와 제12조에 위반되어 위헌임이 분명하다.
-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 2001. 4. 26. 99헌가13 의 반대의견 中, 재판관 권성
위 글은 권성 재판관 1인 만이 반대의견을 낸 99헌가13 사건에서 반대의견의 일부이다(즉 이사건에서 문제된 조항은 합헌 결정이 선고 되었다).
필자는 헌법 관련 판례집을 읽는 도중 위 글을 보고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었다. 정말 판사 개인의 감정이 가득 실려있었고, 아마 본인이 직접 쓰신 것 같다. 사람 마음을 자극하는 글이며, 영미권에서나 볼 수 있는 글쓴이의 독특한 품격과 특징이 잘 드러나는 판결문이라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권성 재판관의 판결 위의 판결 말고도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친 일이 많다. 특히, 고등법원 판사 재직 시절 '항장은 불살이라'로 시작되어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형을 1단계 감하여준 판결은 특히 문제가 되었었다.)
이 판결이 나타나게 된 계기는 암울하였던 국가 경제 상황과도 맞닿아있었다.
부정수표단속법이라는 형사법이 있다. 이 법은 발행된 수표가 부도가 나거나 위조되는 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수표의 부도 또는 위조수표 발행을 한 사람에 대하여 처벌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률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된 법률조항은 부정수표단속법 제2조 제2항이다.
부정수표단속법 제2조(부정수표발행의 형사책임)
1. 가설인의 명의로 발행한 수표
2.금융기관(우체국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과의 수표계약 없이 발행하거나 금융기관으로부터 거래정지처분을 받은 후에 발행한 수표
②수표를 발행하거나 작성한 자가 수표를 발행한 후에 예금부족·거래정지처분이나 수표계약의 해제 또는 해지로 인하여 제시기일에 지급되지 아니하게 한 때에도 전항과 같다.
③과실로 인하여 전2항의 죄를 범한 자는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수표금액의 5배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④제2항 및 제3항의 죄는 수표를 발행하거나 작성한 자가 그 수표를 회수하거나, 회수하지 못하였을 경우라도 수표소지인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는 각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
즉, 이 법에 따르면 수표를 발행하거나 작성한 자가 수표 발행 후 그 수표가 부도가나는 경우 (심지어 그것이 과실이라 할 지라도) 거의 예외없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수표금액 10배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는 것인데, 이는 상당히 센 형벌이라 하겠다. 이 법률 조항은 사업가에게는 사업 실패가 발생한 경우 거의 예외없이 감옥으로 가는 특급 티켓이라 할 정도로, 실제로 상당히 활용되는 조문이다.
위의 권성 재판관은 수표가 부도났다는 이유로 무조건 처벌하여야 하는 위 조항이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지 않는 법조항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을 하면서까지 법다운 법이 아니라고 강변한 것이다.
이 사건은 1997년 이후 IMF 사태로 인하여 수많은 기업이 부도 처리되고, 그로 인한 후폭풍으로 수많은 자영업자가 위 법률 조항으로 인하여 형사처벌을 받을 때에, 법원에 의하여 위헌심사가 제청된 사건이다. (이후 2009년에는 헌법소원이 된바 있으나, 이 때에도 이 사건에서와 같이 합헌 선고가 났다. - 2009헌바267) 우리는 아래의 법논리를 통하여 IMF 사태 이후 얼마나 많은 자영업자들이 아래와 같은 법률조항으로 인하여 처벌되었어야 하였는 지, 그리고 그 법이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이 어느 정도의 괴리가 있는 지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이 법률은 현재에도 규범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위헌심판을 제청한 대전지방법원의 신청취지는 다음과 같다.
(1) 수표와 어음은 같은 유가증권이지만 어음이 신용증권임에 반하여 수표는 지급증권이다. 그래서 수표법은 일람출급성, 이자약정금지, 단기의 제시기간제도 등을 두어 수표가 신용증권화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그러나 백지수표나 선일자수표는 사실상 대여금채권의 담보나 장래에 발생하는 손해배상의 담보를 위하여 신용증권의 용도로 널리 변칙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수표가 어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수표는 부도시 형사처벌이라는 강제성을 띠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 1990. 7. 10. 가입하여 조약 1007호로 발효된 국제연합의 '시민적및정치적권리에관한국제규약' 제11조, 즉 '어느 누구도 계약상 의무의 이행불능만을 이유로 구금되지 아니한다'는 명문에 정면으로 배치되어 헌법 제6조 제1항의 국제법존중주의에 위반된다.
이에 대하여 법무부장관과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의 의견은 아래와 같다.
(1)우리 헌법상의 국제법존중주의는 국제법과 국내법의 동등한 효력을 인정한다는 취지일 뿐 국제법우월주의를 채택한 것이 아니며 또한 국제연합의 위 규약 내용은 '계약상의 의무의 이행불능'만을 이유로 구금되지 아니한다는 것이고 이 사건 법률조항은 단순한 계약상의 의무의 이행불능 이상의 의미를 갖는 특별한 경우를 규정한 것이므로 위 규약에 배치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신청법원과 관계기관의 의견을 종합하여,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관여재판관 다수의견에 따라 합헌 결정을 선고했다.
1.헌법 제6조 제1항의 국제법 존중주의는 우리나라가 가입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는 것으로서 조약이나 국제법규가 국내법에 우선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 법률조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부정수표 발행행위는 지급제시될 때에 지급거절될 것을 예견하면서도 수표를 발행하여 지급거절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그 보호법익은 수표거래의 공정성이며 결코 '계약상 의무의 이행불능만을 이유로 구금' 되는 것이 아니므로 국제법 존중주의에 입각한다 하더라도 국제연합 인권규약 제11조의 명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낮, 법무법인 창천에서. > 판결로 바라본 그 때, 그 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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