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8. 작성된 글
무시할 수 없는 현실, 그리고 안타까움.
이 책을 읽고 처음 느낀 것은 책 내용이 많은 생각을 요한다는 느낌이었다. 이는 단순한 문체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글 자체는 쉽게 읽혔고, 어려운 용어는 친절한 주석이 달려 있었다. 문제는, 제국주의와 우리 자신을 연결시켜서 생각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기 반성이 필요할 텐데, 내가 그러한 준비가 되어있는 지에 대해 회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은, 영화나 소설 같은 매체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군대에서 혹한기 훈련을 받을 때였다. 너무 추워서, 전쟁이 난다면 짜증나서 내가 먼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진급을 거듭할수록, 단지 내 전역 날짜를 늦출 수도 있는 어떠한 사태도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다가 정말 전쟁의 참상에 대해 깨닫게 된 계기는 우리 부대에 전입온 직업군인과의 대화였다. 그는 지난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실제로 대간첩 작전에 투입되었고, 같은 부대의 동료가 전사했던 흔치 않은 군인이었다. 가끔 당직 근무를 서면서 그와 대화를 하고 나면, 나는 밤새도록 죽음에 대해 생각했고,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며, 전쟁 발발 시의 행동 요령을 성찰하기도 했다. 낮은 보안 등급의 정보를 다루었던 내 보직 탓에, 서울은 전쟁 발발 6시간 내에 50%의 기간건물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쟁은 죽음 혹은 공포 그 자체였지만, 나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전쟁에 대한 상상을 끝내고는 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백악관을 다룬 미국 드라마 ‘The West Wing'의 시즌 1에서 전쟁 발발과 관련된 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미국 대통령의 주치의가 탔던 미공군 수송기가 시리아의 기습 대공사격으로 피격되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다. 합동참모본부가 대통령에게 경고성 폭격(빈 건물을 폭격하는 것)을 건의하자, 대통령이 화를 낸다.
“지금 미국 시민이 죽었단 말이오. 건물 하나 날려버리면, 그들은 다시 그 건물을 지을 것이고, 또 미국 시민이 죽을 텐데, 이걸 작전이라고 내놓은 게요!”
대통령의 발언을 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합참의장의 대답은 내 짧은 생각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공항을 폭격하겠습니다. 3개의 터미널과 2개의 활주로, 수천명의 민간인 부상자 외에도 의료용품과 물의 공급에 있어서 일대의 인프라를 마비시킬 것입니다. 의회의 승인이 없다면, 각하께서는 50$의 범죄에 5,000$ 가치의 죄값을 묻는 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상황에서 우석훈 박사가 결정을 내려야한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아마도 보복 공격을 전혀 하지 않거나, 외교적 수단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을 국민의 다수결 투표에 의한다면 어떤 방안이 선택될까? 정치와 선거에 무지한 내가 보기에도, 정권에게는 공항 폭격이 국민들의 지지도를 높이는 데 훨씬 수월한 해법으로 보였다. 이런 내 짧았던 생각이 내 의식에 숨어 있던 ‘촌놈들의 제국주의’였을까?
평화란 단어는 정말 멋진 단어이다.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며, 편안한 단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입을 통해 ‘평화’라는 단어를 외친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적어도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다지 많지 않은 듯 하다. 그 단어를 떠올릴 필요가 없었고, 쓸 일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평화’는 마치 ‘정의’나 ‘자유’와 같은 단어처럼, 숭고한 단어로 변해갔던 것 같다. 책 속에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되, 친구 입을 통해 듣는 것은 뭔가 이상한 단어가 되어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평화’로부터 격리시켜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평화와 멀어지게 된 것은 역시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보인다. 점점 심화되는 경쟁 구도의 사회 속에서 공동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뭐든지 이기고 보자는 생각이 만연되었다. 그리고 승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는 사회가 되어간다. 서울에서 지방을 바라보는 눈, 남한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눈, 한국 사회에서 이민족을 바라보는 눈은 또 하나의 (광의의) 오리엔탈리즘이 되었지만, 이를 경쟁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주로 한반도와 극동아시아의 3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를 읽은 독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갖게 된다. 적어도 한번의 생각을 더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긍정적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한국경제대안 시리즈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한계라 생각되기도 한다.).
우선, 이 책에서 (‘극우파’라고 지칭되는) 정치권을 탓한 만큼의 분량을 독자들을 비판하는 데 썼다면 하는 아쉬움이다. 평화경제학과 같은 커다란 이야기도 좋지만, 우리들의 소소한 일상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적이거나 식민주의적 행태들을 조금 더 지적했다면 독자들은 스스로의 일상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개 이러한 이야기는 어렵게 쓰여지기 마련이지만, 평화경제학이란 낯선 개념을 이처럼 명쾌하고 쉽게 설명한 우석훈 박사의 글이라면 10대들이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 속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 내부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그저 그런 뻔한 생각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 없었다. 우석훈 박사도 그런 뻔한 생각에서 많이 벗어날 수는 없었나보다. 그가 책에서 썼듯이, 그의 생각은 해답이 아니라는 친절한 설명이 이를 대변한다. 이처럼 문제를 지적하기란 쉽지만, 대안을 제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우석훈 박사의 시각을 빌어 조금 더 신선한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문제를 인식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이제 저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저자는 건설주의적인 경제 성장 모델에 많은 회의감을 갖는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건설을 비롯한 가시적인 경제 발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고, 자원 확보 경쟁이나 민족주의적 발언은 사람들의 단결을 이끌어 낸다. 이 책은 그 같은 우리들의 태도가 제국주의적 시각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평화를 위해 상호 이해를 전제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 내가 갖는 질문은 무척이나 세속적이다. 내가 변한다고 세상이 변할 수 있을까. 설령 결국에는 세상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에 우리는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낙오자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두려움을 해결하기에는 저자의 대안은 구체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내일의 희망보다는 눈 앞의 이익을 선호한다. 평화의 공공재적 성격으로 인한 한계는 절대 무시할 수 없고, 개인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 저자가 제시한 ‘총파업’이 정말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이러한 내 생각이 어쩌면 나의 무식함 혹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증거일까? 그만큼 지금까지 내 성장 배경으로 존재했던 우리 사회의 제국주의적 환경은 무거웠던 것 같다.
사실 이러한 책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다.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강요하고, 불편한 진실을 들이밀고, 주위와 미래에 대해 애써 눈감는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비추어준다. 그렇지만 필요한 책이다. 인간성에 대해 생각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내일의 희망을 꿈꾸기 위해서이다. 이제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보자. 역시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계속 아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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