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밤, 집에서./책, 그리고 감상.

괴물의 탄생 - 우석훈

2008. 10. 10. 작성된 글



아이가 타고 있어요.

 

 

 내가 태어난 때가 1985년 12월이다. 그로부터 벌써 24년이 지나고 있다. 그 사이에 강산이 두 번은 바뀌고, 지금 세 번째 변화가 진행 중이다. 정권은 권위주의적 정권에서 문민정부로 바뀌었고, 다시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바뀌었다. 대우가 망하더니, 현대가 갈라지고 이제는 삼성만이 남았다. 정몽헌 회장이 톡 떨어져 저 세상으로 가시더니, 최진실도 목 메달아 하늘로 갔다.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리고,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월드컵으로 나라가 들끓었다.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10년에 한번 씩은 꼭 벌어지는 듯 하다. 정말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중요하지만 내겐 쓸데 없다.

 

 이렇게 쉴 틈 없이 질풍처럼 우리를 거칠게 몰아치는 세월은 정말 많은 기억을 떠 맡기고 있다. 나 역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가끔씩 덥썩덥썩 받곤 했다. 그 중 가장 힘들었던 것, 혹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IMF'다. 그 놈의 아이엠에프는, 우리 집으로부터 많은 것을 앗았다. 잃은 것은 당시 아버지의 직장 만이 아니었다. 딴 세상으로 날아간 것은 여유, 웃음, 여행 등 다소 사치스러운 것들일 수도 있다. 덕분에 얻은 것도 있다. 현실에 대한 눈. 적어도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 때까지 나 몰라라고 놀 줄만 알던 중학생 하나는 드디어 공부란 것을 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으니, 오늘날의 교육현실을 감안할 때, 손해본 장사가 아닐 수도 있겠다. 바로 이런 것이 내 삶에 진짜 영향을 미쳤던 것들이다.

 

 질문 하나를 또 던지겠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20여년 동안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 지 궁금하다. 과연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며, 혹시 당신들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 지. 교수님들께서 이야기하셔도 좋다. 사실 많은 분들이 꼽는 87년 6월 항쟁 따위는 처음부터 내 기억에 없으니 궁금하기도 하다.

 

 인생을 회고해보셨는 가?

 이제 본래 하고자 하던 이야기를 하겠다. ‘괴물의 탄생’을 읽어보니 ‘우리의 미래는 정말 우리가 하기에 달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괴물의 해체에 대한 문제 의식은, 단지 내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갖게 되었다. 공공성, 고용, 생태, 사교육 해체, 토호구조, 자치, 문화. 다들 좋은 단어들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들이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삶을 다시 곱씹어 볼 때, 저러한 단어들을 위해 당신들이 지금 무언가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지를 묻고 싶다. 혹시 그러한 필요성을 느낀다면, 내 질문을 명확히 하고 싶다. 내가 묻는 것은 ‘당신들이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당신들이 할 수 밖에 없는가?’이다. 대부분의 대답은 ‘아니오.’가 아닐까? 그리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 주기를 바란다.’는 말이 이어져서 나올 것 같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우리 대중들은 삶의 문제로부터 유리될 수 없고, 특히 내일이 아닌 10년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라는 것. 지금의 대중에게는 별 다른 희망이 없다.

 

며칠 전, 나는 괴물의 해체에 관한 문제가 마치 경제학 입문 시간에 아주 잠깐 등장하는 게임이론의 사례처럼 느껴졌다. 게임이론을 따로 공부하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경제학과에 있는 선배에게 게임 이론에 대해 물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 즉 공공재에 대해서 게임 이론으로 설명해 달라는 나의 물음에, 선배의 대답은 간단했다. “게임이 성립이 안 되므로, 제3자가 개입해야 하는 데, 대부분 국가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국가를 생각해 볼 차례다.

 

국가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지 살펴 보니, 정말 멋진 일들을 하고 있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을 외치더니, 이제는 공기업을 민영화시킴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시킨다고 한다. 효율성의 극대화는 ‘국가의 개입 감소’와 ‘행정 비용의 절감’을 의미한다. 국가의 개입 감소는 공공 영역의 사업으로부터 손을 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덕분에 대규모 감세가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비용의 절감은 어떻게 진행되는 지 살펴보니, 조직 축소, 이윤극대화, 위험 회피, 규모의 경제, 경쟁 등 기업 용어만으로 설명이 된다. 이렇게 정부는 공공성, 고용, 생태, 사교육 해체, 토호구조, 자치, 문화로부터 스스로를 떨어뜨리고자 한다.

 솔직히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런대로 설명이 가능하다. 가령, 이건희 회장이 대한민국 평균 세금의 17배를 낸다고 가정할 경우, 어쨌든 그는 이 보험료를 납부한다. 그러나 그가 아팠을 때 구급차는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보다 17배 더 빨리 그에게 달려가지 않는다. 또한 그의 집 온수는 17배 더 따뜻하지도 않고, 그가 사용할 서울 하늘의 공기도 유별나게 17배 더 깨끗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국가가 하는 일이 아주 몰상식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대중은 이의를 제기할 논리도 없고, 힘도 없다. 대한민국의 재정의 상당부분을 담당하는 상위 1%를 필요 이상으로 화나게 해 보아야 특별히 이익이 되는 것도 없다. 국회의원들 역시 마찬가지로, 어차피 4년 후에 선거 자금을 후원받아야 할 대상을 특별히 괴롭힐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국가도 두 손 놓고, 게임이론의 결과만을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을 테다.

 

 괴물의 해체? 한 마디로, 답이 없다. 혹시 혁명이 발생한다면 모를까,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다면, 내가 보기에 ‘괴물의 해체’는 그냥 해 본 소리로 머물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딱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베버가 말했던 대로, 사회가 그 구성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변화하는 경우이다. 대중이 괴물의 해체를 위해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더라도, 또한 국가가 괴물의 해체를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더라도, 마치 서구 사회에서의 청교도주의처럼, 우리 사회에서 ‘우석후니즘’이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러한 비유형적 인과과정을 통한 ‘괴물의 해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여기서 ‘있었’던 이유는 그가 2005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헌터는 유명한 NGO, ‘그린피스’의 초대 회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고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만년에 좌절하고 말았던 것 같다.

 

'아이가 타고 있어요'라는 표지판을 달고 운전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모로서의 염려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쇼핑몰로 운전하며 가는 동안 배기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질이 자기 자식이 물려받을 세상을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순간에는 쇼핑몰로 안전하고 최소의 노력으로 빨리 도착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일 뿐이다. 빠른 속도라는 가치관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 걷지 않아도 된다는 신념 또한 가장 명백하다. 그리고 재앙은 시작된다.

- 『2030, 기후대습격』 中

 

‘ 아이가 타고 있어요.’라는 표지판을 달고 운전하는 사람.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그러한 사람일 지 모른다. 아니,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아이를 태우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