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24. 작성된 글
저자가 밝히듯이, '털없는 원숭이'라는 용어는 인간을 객관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단어로 털없는 원숭이를 접하는 순간, 인간은 철저히 동물의 한 종에 지나지 않게 노출된다. '인류는 생물체라는 점에서 여타 종의 생물과 같은 가치를 지니는가?' 라는 질문은 다윈의 진화론 이후 줄기차게 제기되었던 질문이다.
교황청은 신성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 같은 이론을 탄압하는 데 나섰지만, 점차 퍼져나가는 진화론의 맹위 아래 창조론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 갔다(하지만, 오늘날 창조론은 새롭게 해석되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자연과학계는 인류와 자연을 피지배 관계로 놓았던 그들 스스로가 정립했던 이론의 모순을 피하기 위하여, 합리화 작업에 착수한 지 오래이다. 인문사회학에서조차 인간은 결코 자연과의 관계 앞에서 무조건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되는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는 인류를 자연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할 필요성을 체감한다. 만약 다른 종과 털없는 원숭이의 차이가 고양이와 개의 차이에 불과하다면, 인류는 그동안 누렸던 수많은 호사를 포기해야 할 윤리적 문제가 제기된다. 그 점에서, 인류는 딜레마에 빠진다.
'털없는 원숭이'가 본질적으로 파헤치는 질문은 바로, '인류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작업과 상통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류의 가치를 논하는 순간, 인간과 동물의 차이(혹은 유사성)는 수면 아래에 가라앉고, 윤리적인 논변과 철학적인 논쟁만이 넘쳐나게 된다. 인류가 자연을 이용하고, 극복하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인류는 여타 종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 이같은 수많은 질문들을 '동물학'의 관점에서 다른 학문적 가치를 배제하고 논한 것이 '털없는 원숭이'일 것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인류와 다른 동물과의 차이는 '진화의 방식'일 뿐이다. 인류는 진화의 과정에서 그 의도나 동기와 관계 없이 결과적으로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현재의 생물학적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인류는 여타 종의 생물을 압도하고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점이 인류는 여타 종을 영원히 지배한다거나, 인류가 여타 종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류는 과거 영장류였을 때의 수많은 생물학적 특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퇴화(예컨대, 유태보존)한 측면조차 있다. 따라서 인류는 동물의 한 종이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오만에 빠지기 보다는 겸허한 자세로 미래를 논하여아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한 몇몇 질문에 어떠한 답변을 암시하는가? 인류가 여타 종과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윗 문단에서 말한 바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경우 이 책은 분명히 종들 간의 우열 - 특히 생물학적인 특성에서의 우열, 을 긍정한다. 즉, 인류와 동물의 평등을 이 책의 저자는 결코 논하지 않고 있다. 비록 윤리적 질문에 입을 다물고 있지만, 이 책의 저자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대답은 서로 엇갈릴 것이다. 이 책의 업적은, 일단은 여타 학문의 장(field)을 배격하고, 단순히 진화론적 입장에서 동물학의 장 위로 논쟁의 무대를 옮긴 데에 있다. 물론 동물학 위에서의 논쟁은 동물학 내에서만 그 영향력을 보유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 - 바로, 인류와 동물 간의 유사성과 차이성의 정도를 말한다. 을 옮겼다는 점, 하나 만으로 인류와 동물의 관계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의 구도의 실타래가 조금은 풀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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