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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집에서./책, 그리고 감상.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


2009. 2. 24. 작성된 글



장하준이 밝혔듯이, 이 책은 그가 스타덤에 오른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의 대중판이다(참고로, 국가 관료형을 위한 버젼으로는 '국가의 역할'이 있다.). 덕분에, 이 책은 그가 처음 펴냈던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일관되게 주장하였던, 신자유주의의 허구성에 대해 역사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의 지적은 흔한 말로, 적당히 맞아 떨어져보이고, 적어도 경제사적인 분석의 측면에서 허구성은 없어보인다(물론, 이는 비전문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책에 대한 찬사는 수많은 인터넷 상의 서평과, 노엄 촘스키와 같은 지성들의 추천사 만으로 충분할 테니, 몇가지 이해가 가지 않거나 수긍할 수 없는 바를 이 글에서는 지적하고자 한다.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쉽게 요약된다. '현재의 선진국이 거쳤던 발전 경로를 후발 국가가 밟지 못하게 함으로써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선진국들의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는 허구다.'


그래서, 몇가지 의문을 던지고자 한다.

 

그는 그의 주장에 대한 대부분의 근거로서, 선진국들의 역사적인 발전을 예시한다. 그러나, 그는 그 책에서 인용하였던 케인즈의 말대로 '사실이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는 말로서 비판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영국이 발전하였던 18세기와 모잠비크가 발전해야 할 21세기의 사실-각종 제도, 인프라 등-은 무척이나 다르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 지, 혹은 하였어도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구하지 못하였는 지를 이 책에서 명백히 밝히지 않는다.


 

또한, 그는 일관되게 제도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즉, 어떤 나라든 각 나라에 맞는 제도를 채택함으로써 경제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주장은 조금은 완화되고 완곡된 표현으로 나타난다. 신자유주의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각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자조차도 그 같은 극단적인 주장에 명백히 동조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바로는 없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자들은 확실한 제도의 도입과 명백한 통제 및 규제가 이루어질 때 신자유주의의 효과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도, 좌파 맑스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것으로 보지만, 신자유주의자 혹은 고전경제학자들은 시장에 대한 규제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장하준의 주장을 뒤집어 살펴보면, 신자유주의적 제도 도입이 필요한 나라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해야한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 발전에 필요한 각종 제도나 문화적 토양을 쌓기 위해서는, 경제학이 아닌 다른 학문-예컨대, 법학, 행정학, 사회학 등-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지만, 장하준은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몰라도 놀라울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언급에 그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문화결정론적 시각을 완강하게 부인한다. 그러나, 나는 그 문화결정론적 시각을 그토록 부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도 책에서 인정하듯이, 어느 정도의 문화적 차이가 경제 발전의 속도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그러나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경제 발전이 원천적으로 금지된다는 주장을 하는 극단적인 문화결정론자들은 흔치 않다. 또한, 문화결정론자들이 문화를 연구하는 이유는 오늘의 문화를 비교함으로써, 인간과 사회를 잘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 경제 발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하준은 경제 발전의 측면에서 문화결정론을 바라본 결과, 수많은 경제 외적인 문화인류학적 관심사 - 예컨대, 종교의 작동 원리, 사회의 형성 및 발전, 구조기능주의적 분업화의 발전 양태 등- 를 소외시키고 있다. 또다른 경제학자인 제프리 삭스의 경우, 문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기 보다는 문화의 토양이 되는 지리를 분석한다. 그는 '빈곤의 종말'에서 지정학적 분석을 통하여 경제 발전을 위하여 '바다(값싼 운송 수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경제 발전에 인프라가 최우선적으로 도입되어야 하며 적어도 인프라 설립에 관한 한 선진국은 포괄적인 원조를 해야 한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장하준은 개발도상국의 발전 방법으로서 두 가지 유형을 제시한 바 있다(참고 :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첫째는 과거 박정희 정권 하의 한국과 일본, 그리고 오늘날의 중국처럼, 수출주도형 추격전략이고 두번째는 대만, 싱가폴의 방법처럼, 수입대체형 추격전략(남미의 수입대체형과는 다르다. 이들 국가는 철저히 국가가 자본을 통제했고 민간을 제어했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모조리 권위주의적 정부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한국-박정희, 일본-자민당, 중국-공산당, 대만-국민당, 싱가폴-리콴유).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경제를 발전하고자 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경제 발전 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호감을 공공연히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점은 그의 주장에서 가장 큰 약점일 것이다. 그가 좌파로부터도 공격받는 이유는, 재벌과 국가 통제형 경제 정책을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편, 그가 우파로부터 공격받는 이유는, 시장의 기능을 평가절하하고 보호무역을 찬성하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하면, 장하준의 주장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물론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유형의 이론이 탄생할 수 있을 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1. 장하준은 경제사를 분석함으로써 오늘의 문제를 말하지만, 오늘과 과거는 다르다.
2. 장하준은 제도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에, 경제 제도 외의 요인에 대한 검토가 부실하다.
3. 문화결정론과 같이, 그에 반하는 주장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부실해보인다.
4.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너무 가볍게 다루는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장하준은 형편 없는 엉터리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지적하는 문제들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특히나, 후발국가에서 선진국가로 그 위치를 달리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조차, 그가 말하는 보호무역의 전면적 도입을 환영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다. 만약 보호무역을 찬성할 경우 수출 산업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의 경제는 단기적으로 오늘날보다 훨씬 강한 침체를 겪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경제학적인 근거 뿐만 아니라, 국제정치학과 같은 다른 학문에도 강한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경제학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국제 정치 역학에 따라 종속되는 경향을 보인다.

 

(장하준이 우리 나라의 경제 정책에 대해 주로 언급했다는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궁금해하는 몇가지 의문점을 해결 할 수 있다는 기대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