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5. 3. 작성된 글
원제 : He wouldn't Be King - The Story Simon Bolivar. 351p.
아메리카의 진정한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의 위인전기이다. 일종의 평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볼리바르라는 사람에 대해 처음 알았던 것은 중학교 1학년 쯤이다. 물론 그 전에, 세계사에 관한 만화책에서 본 듯한 기억도 나지만, 어느 다큐멘터리(혹은 잡지)에서 볼리바르에 대한 것을 방영한 듯 하다. 그 때 볼리바르는 남아메리카의 조지 워싱턴 이라고 소개했었던 듯 한데, 이 책에서도 그러한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자(이정민)가 역자 후기에 써놓았긴 했지만, 우리는 같은 해방자인 조지 워싱턴은 우리나라의 국부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 대통령보다 잘 알면서, 같은 해방자인 시몬 볼리바르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워싱턴이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 등이 속해있는 13개주를 독립시켰다면, 볼리바르는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5개국을 독립시켰다(후에 볼리바르에게 자신의 지휘권을 양도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산 마르틴은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켰다). 만일 그가 구상했던 대로, 콜롬비아 연방(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 페루, 볼리비아)이 존속했다면(볼리바르가 대통령직에서 은퇴한 직후 이 연방은 각국간의 불신으로 인하여 해체되었다), 남미는 북미의 미국과 같은 힘과 위상을 지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사람에 대한 업적은 적어도 남아메리카에서는 어느 나라 수도를 가든지(브라질을 제외한), 가장 큰 광장에 그의 동상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기념관이 있다고 하니 그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듯 하니, 따로 쓸 필요는 없겠다.
볼리바르가 순수한 열정과 이상을 가지고 스페인으로부터 남미 식민지들을 독립시킨 것은 위대한 일임에 분명하지만, 몇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1. 페루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자 하는 왕당파 세력이 공화파 세력보다 더욱 컸음에도 불구하고, 볼리바르는 정복자의 발걸음으로 페루를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켰다. 이것이 과연 잘 한 일일까? (덕분에 페루의 한 지방이었다가 독립했던 볼리비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페루의 종신대통령이었던 수크레(볼리바르의 가장 절친한 동료 - 그의 인격과 품격은 매우 고결하여 정치적 반대파로부터도 항상 인간적으로는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는 외딴 길에서 왕당파 무리로부터 암살당하였다.)
2. 영국식 민주주의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상원 의원직의 세습제를 추진한 것은 이해할 수도 있으나, 왜 그가 종신대통령을 지향했는 지도 의문점이다. 덕분에 그의 반대파들은 그를 독재자라고 하여 보고타에서 그를 암살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것이 그의 몰락을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남아메리카 연방을 확고히 하기 위한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그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대다수 남아메리카인이 지지하던 왕정주의를 채택하여 국왕으로 올랐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최소한 오늘날의 남미 반군, 지역갈등은 막지 않았을까.
- 이 책의 제목인 나는 왕이 아니다. 라는 것은 그가 해방시켰던 베네수엘라의 초대 대통령 파레스, 콜롬비아 연방의 초대 부통령이자 훗날 독립한 콜롬비아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산탄데르 등이 시민들을 대표하여 건의한 왕위 즉위를 그가 단연코 거절한 대목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 부분은 단연코, 감동적인 데, 그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과 조지 워싱턴의 예를 들면서,
" 내 조국의 국민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한 난 절대 그들을 버리지 않ㅇ르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롭고 앞으로도 영원히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투쟁 끝에 태어난 아메리카 황제 따위는 바라지 않아요. 우리의 지도자는 좀 더 고귀한 운명을 지녀야 합니다. "
라고 대답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정말 감동적이긴 하지만, 그의 이러한 태도로 인하여 훗날 왕정 복구 운동이 일어나고, 그는 실각했으며 훗날 프랑스에서 4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그에 대한 존경심은 오늘날에도 여전하지만, 그것은 약간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 듯 하다.)
3. 어쩔 수 없이 스페인 귀족 출신 백인이었을까? 그가 가장 독립에 있어서 가장 수동적이었던 페루를 "정복"할 때, 동원한 군대는 징집한 군대, 또 아무것도 모르던 인디언을 몰아세웠던 군대였다(이 부분은 책에 자세히 서술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강제로 끌고 갔었는 지 여부는 모르겠다. 다만 모병은 아님에 분명함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그가 에이브러햄 링컨보다 46년 앞선 1816년 남아메리카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는 것을 보면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었겠지만, 약간 마음에 걸린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그의 인종에 대한 시각은 매우 진보적인 것임은 틀림없을 듯 하다.
4. 그의 중대한 실수가 있다면, 나는 그가 남미를 북미와 비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미의 지배자였던 영국은 북미의 13개국(현재 13개주)이 서로 교역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고, 세금 정책 역시 스페인에 비해 훨씬 가벼웠으며, 따라서 그 지방은 스페인이 법으로 상호교역을 금지했고, 신분제 사회가 엄격했던 남미와는 차원이 달랐다.)을 남미의 5개국과 단순 비교함으로써 연방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성급한 게 아니었나 싶었다. 당시 남미는 미국(현재의 미국 동부지역)과는 달리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좌우지방간의 교역이 불편했으며(실제로 그가 업무를 보았었던 대표적인 도시 리마와 보고타간의 서신이 오가는 데 5달이 걸렸다고 한다), 또한 지역감정이 매우 심하였다고 하는 데(콜롬비아 속담 중 베네수엘라인을 믿느니 차라리 ~하겠다 라는 식의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것을 간과함으로써, 훗날 베네수엘라의 파레스 대통령과 콜롬비아의 산덴타르
대통령의 불화를 야기시킨 측면도 있었다.
# 가장 멋있는 장면을 꼽아라면, 볼리바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났던 아야쿠초 평원에서 벌어진 수크레가 지휘한 전투인 것 같다.스페인 진영의 카테라스 장군과 라 세르나 총독은 나폴레옹 전쟁 때의 명장이었고, 물론 병사도 그 쪽이 많았는 데. 이 전투는 총성 한발 나지 않고 거의 완벽한 기마전(칼과 창으로-)이었다.
- 수크레 측의 젊은 장교이자 수려한 외모와 불같은 성격의 청년, 코르토바는 적군이 돌진해오는 소리가 들리자, 말에서 내려 자신의 칼로 말을 찔러 죽였다.
"이제 나는 도망칠 방법이 없고 도망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후세에 길이 남을 명언으로 진격 명령을 대신했다.
"무기는 좋을 대로 들어라! 대신 정복자의 발걸음을 내디뎌라!" (243p) -
정말 멋있지 않나? ㅋㅋㅋ
# Romance.
그는 일생에 결혼을 두번 했는 데. 첫번째는 스페인의 어느 귀족, 마리아였다. 그녀가 16세 때 결혼의사를 처가에 밝혔다고 하고, 당연히 그 집안은 뒤집어졌으며, 합의를 본 것이 '프랑스 파리로 볼리바르가 1년간 유학을 가서 다시 생각해보자' 라고 한 것인 데, 결국 볼리바르는 1년 뒤 그녀와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배움으로써 남미의 혁명을 이끌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 첫번째 부인은 결혼한지 10개월만에 남미의 기후 적응에 실패하여 결국 죽고 말았는 데, 볼리바르는 그녀가 죽은 뒤 식음을 전폐하고 매우 슬퍼하다가 곧 두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가 평생을 쫓아다닌 콜롬비아 연방이다.
어쩄거나 우리가 북미의 조지 워싱턴을 추구하는 만큼 남미의 볼리바르 역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매력있는 위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사랑, 또 안데스 산맥을 두번이나 넘은 용기(나폴레옹과 한니발의 알프스 산맥 등정과 비교해보라-),는 오늘날 흔히 발견되지 않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분명히 나는 이 책에서 남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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